‘말의 시나리오’를 읽다가 든 생각: 숨죽인 채 살아가는 당신에게 #1
생각해 보자. 당신은 노예인가? 아니면 자기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인가?
아마도 노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비참하고 불행하게 느껴지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노예였다. 20대 시절, 100여 명이 소속된 조직을 운영하며 관리했던 일이 있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소속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았고, 보통 만나서 하는 일은 대화였다.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거나 개선을 바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음을 다해서 듣고 가능하다면 일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일종의 상담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상담'을 하는 동안 안타까운 일도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많았던 일 중 하나는 이와 같다. 문제가 되는 일이 있고 이에 대해 자신의 마음, 거부감, 또는 바라는 바를 표현하면 되는데 그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그저 인간적인 호의로 잘 대해준 것을 이성인 상대방이 오해해서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해 오는데 그것이 부담스럽고 싫다던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방향이 있는데 그것이 부모님의 바람과는 맞지 않고 그 상태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걱정만 하고 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참 답답했다. '말을 하면 되는데, 말을 하지 않으면 일이 해결될 수 없는데… 표현하지 않고 저절로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 아닐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원하는 삶보다는 남이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그렇구나, 어떡하지…"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 글을 보는 당신도 그렇게 출구를 스스로 닫아놓은 문제를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부끄럽게도 나는 정말로 그랬었다. 나도 또한 출구 없는 문제를 만들어 답답해하며 노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 눈 딱 감고라도 "나는 하지 못하겠다.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년 동안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며 주인 의식도 갖지 못한 채 하라는 만큼만 딱 수동적으로 하는, 생각 없는 노예가 되었다. 수없이 많이 후회하고 다짐을 한다.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고, 아닌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거절해야지.'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여전히 전과 같은 선택을 하고, 사실은 노예처럼 살던 그때에도 그와 같은 후회와 다짐을 이미 반복해 왔었다.
'하기 어려운 말 뒤에는 놀람, 두려움, 눈물의 기억들이 산다.'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이 말이 참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담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나도 하고 싶은 말 뒤에 그런 기억들을 두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말을 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될 상대방의 표정은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도 많다. 그 기대와 다른 현실이 우리를 놀라거나 두려움에 떨게 하고 급기야 눈물을 짜낸다. 상냥하게 우리의 의견을 수용해 줄 수도 있지만, 자신과 반대되는 우리의 의견에 분노하거나 부정한다. 이후 상대방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가 내비친 우리의 표현(상대방에게는 거절)이 불러일으킨 그 큰 반향에 압도된다. 이후에 같은 일이 생겨 나를 표현하려 할 땐 생각하게 된다. 이 이후에 나타날 표정과 말들을 마주하며 내가 소모하게 될 감정과 마음, 흘리게 될 눈물을 생각하면 '그냥 안 하고 말지.'라고 결론 내리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몇 번 해보다 보면 상상만 해도 다시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고 여러 말을 주고받으며 하게 될 감정 소모에 진절머리가 나게 된다. (비슷한 일을 떠올리며 부르르 하고 진저리 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런 것도 삶의 한 모습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삶에 바라는 것도 없었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없이 살아도 크게 문제 되지 않고 적당하다 생각했었다. 삶을 더 나아지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성공이란 것도 바라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해왔던 이 수동적이고 회피하는 노예근성을 단번에 삶에서 덜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 그래도 지난날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던 것처럼 일단은 해보려 한다.
다시 돌아보면 상대방의 그런 반응들도 적응하기 나름이다. 처음에는 그저 놀랄 수 있겠지만, 점차 내가 자기표현을 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분노, 무시, 강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받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내보이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해야 내 의견을 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울 수 있고 기껏 찾게 된 방법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라면 상대방이 더 이상 나를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그 말속에서 피어나는 주체성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무엇이라도 하면 그때는 더 좋아지건 나빠지건 어떻게든 바뀌게 된다. 흔하고 뻔한 말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 나를 바꿔가 보려 한다. '말하기'는 내 삶을 내가 이끌어가는 가장 쉬우면서도 놓치기 쉬운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