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각들

믿는다는 것

에밀. 2025. 4. 2. 23:42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아.”


그 말을 들었을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니까.

그런데 집에 돌아와 문득 다시 생각이 났다.
그럼 어떤 사람을 믿는 걸까? 믿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걸까? 나는 어떨까?
당연하게 여겼던 개념인데, 막상 말로 정리하려 하니 쉽지 않았다.

믿는다는 건, 상대가 내게 얼마나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 ‘예상’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전적 정의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상대로부터 받을지도 모를 피해를 내가 얼마나 감수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정확하다고 느꼈다.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어떤 목적을 위해 오랜 시간 웃는 얼굴을 비치며 상대의 신뢰를 얻기도 한다.
그러다 중요한 순간에 등 뒤에서 칼을 꽂는 일도 생긴다.
그 순간, 지금까지 쌓였던 모든 플러스 요소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아무리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다가와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지켜본다.
그 기준은 시간일 수도 있고, 받은 호의의 크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있어.”
이는 그 사람이 우리의 기대에 맞게 행동할 것이라 믿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은 늘 내 마음 같지 않다.
기대가 무너졌을 때, 비로소 믿음의 실체가 드러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혹시 상대의 사정이나 상황을 충분히 듣지도 않은 채 이런 말을 했다면,
실은 그다지 깊이 믿고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상대의 입장을 듣고 나면 그 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믿음이란 결국, 내가 받은 긍정적인 태도를 일종의 ‘가치’로 환산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말을 바꿔보자.
내가 받은 호의의 크기에 비례해,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손해의 크기도 커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적당한 친절함은 갖추었지만, 이기적이어서 잘 베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간혹, 내가 보인 소소한 친절에 더 큰 호의로 보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감동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 마음을 되돌려주고 싶어진다.

이 주고받음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기쁘다.
결국은 제로섬이 될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고마움과 기꺼움은 크고 따뜻하게 남는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게 된다.

“설령 이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손실을 입더라도 괜찮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 믿음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믿음이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여는 일이라고.
상처를 감내하면서도 그 사람 안의 더 나은 무언가를 보는 일이라고.
그 말도 맞는 듯하다. 믿음은 손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손해가 왔을 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신뢰보다 ‘계약’에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친구 사이도 서로 선을 긋고, 연인 사이도 확신보다 계산을 우선한다.
계약은 불확실성을 줄여주지만, 동시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더욱 ‘믿는다’는 말이 드문 시대다.

믿는다는 것은 어느 날 문득,
마음의 자물쇠를 살짝 열고 그 안으로 한 사람을 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혹여 내 안에서 무언가를 가져간다 해도,
“그래,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


그게 나에게 있어 믿음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그런 ‘믿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 질문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의 믿음의 자리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