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각들

사랑받고 싶어서 시작된 내 편 찾기

에밀. 2025. 4. 9. 01:37
“나는 애정결핍이라서 사람들에게 더 다정하려고 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나를 좋게 보이도록 애썼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눈치도 많이 봤고, 싫은 소리를 삼키기도 했다.

성인이 된 어느 해, 학창 시절 다녔던 교회를 몇 달간 다시 나간 적이 있다.
그때 심리상담소를 운영하시는 사모님 덕분에 집단 상담을 받게 되었다.
내면아이 치료를 받으면서, 내 안의 외로움과 애정결핍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가장 오래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동생이 태어난 후의 어느 날 밤,
나는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쫓겨났던 아이였다.
물론 물리적으로 완전히 집 밖으로 쫓겨난 것은 아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밀려난 기분이었다.
어릴 적엔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들으며 안방에서 잠들곤 했다.
그런데 동생이 자라자, “오빠니까”, “이제 컸으니까” 하는 말과 함께 방을 옮겨야 했다.
어두운 방이 무서웠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작아진 목소리를 멀리서 들으며 겨우 잠들던 기억.

그때 나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어머니의 사랑이 언제든 내게서 사라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라는 걸, 어린 마음에 처음 깨달았던 게 아닐까 싶다.
동생은 어리고 약하니까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걸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게 곧 ‘내가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감정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내 애정결핍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내 편을 찾고, 만들고 싶어 했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에게 애정을 쏟아줄 사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내 편.
사실 이건 완전히 사막에서 진주 한 알 찾기의 여정이었다.

어릴 때, 친구들 중에서 그런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투닥거리며 서로를 놀리고, 깎아 내리기 일쑤였다.
초등학생인 나는 빠르게 친구들이 내 편이 될거란 기대를 접었다.
여자아이들과는 딱히 가까울 기회가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게임 속에서의 관계가 더해지게 되었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게임이었고, 여성 유저들도 많았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의 이야기도 조금씩 건넸다.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도 나름의 관계가 형성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 였던 것 같다.
‘잘 들어주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

그때 나는 ‘내 편 만들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믿었다.
말하고 싶은 사람과, 잘 들어주는 사람.
그 조합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듣기’는 약간의 집중력과 정성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비교적 쉬운 과제처럼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게임은 계속했고, 문자와 통화는 점점 더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은 아직 어렵게 느껴졌다. 이것은 다행인 일이다.
마음의 빈자리를 현실에서 채웠다면, 아마 나는 당시 해야 할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0대가 되자, 애정결핍의 극복과 내 편 찾기는 본격적인 실전에 돌입했다.
이성과 대화하는 데는 어색함이 없었지만, 관계를 이어가고 진전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여전히 소심했고, 주변의 말에 쉽게 휘둘렸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방어적이고, 계산적이었다.
대학 생활은 가십이 넘쳐났고, 사소한 일도 쉽게 소문이 되어 떠돌았다.
나는 그런 환경을 피곤하다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 홀린 듯 관계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굶주린 사람처럼 첫 연애를 시작했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이후로도 몇 번의 연애를 더 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늘 내 안에 있었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성취가 부족하다는 열등감에 휩싸였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했다.
스스로를 먼저 살피지 못한 채, 계속해서 타인의 애정으로 나를 채우려 했던 것이다.
서른을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여정을 멈춰야 하는 게 아니라, 이제야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는 걸.

‘내 편 찾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야, 그동안 비켜가려 했던 단계를 다시 밟아보려 한다.
그 시절 외면했던 나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때 알아주지 못했던 나를 이제는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다정함은 결핍에서 피어난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싶어 애쓴 시간들은,
나를 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애정결핍으로 인한 내 편 찾기는 참 고달팠다.
때론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 자신을 속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다정하면서도, 때론 기만적인 사람이었다.

다정함은 언제나 온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론 내 안의 허기를 감추기 위한 기만이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안다고 해서 곧장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덮어두지 않고 마주하려 한다.

결국 나는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였고,
이제는 그 아이를 알아봐주는 내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가장 든든한 편이 되어주려 한다.
마침내, 내 편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