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주고받는다는 건, 내가 거기 있다는 뜻이야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아, 나 사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 생각이 말이라는 형식을 입으며 정리되고,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알아채게 되는 순간. 그게 참 좋다.
그리고 그 말 위에 상대방의 생각이 덧붙여져, 내 생각이 더 단단하고 넓은 사고로 자리잡게 될 때면, 그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예전에는 글을 쓰지 않아서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대화는 나에게 그 생각들을 말이라는 그물로 건져올릴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입 밖으로 무언가를 꺼내려면 한 번 더 곱씹게 된다. 이 생각을 해도 괜찮은 걸까? 말이 되나? 어떻게 들릴까?
그리고 내 입으로 뱉은 말을 다시 내 귀로 들을 때, 나는 그제서야 내 생각을 온전히 듣게 된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표정이 먼저 반응하고, 곧이어 나오는 그 사람의 말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시선을 만나게 될 때다.
그 순간은 단순한 소통을 넘어, 서로의 생각이 맞닿고 교차하며 확장되는, 진짜 ‘대화’가 된다.
그것이 내가 대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대화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는 말할 일이 줄어들고, 듣는 시간이 많아진다.
요즘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에 목마른 듯 보인다.
터져나오는 그들의 감정과 경험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듣는 쪽이 된다.
그런 만남이 반복될수록 내 말은 점점 갈 곳을 잃는다.
내가 말을 꺼내려고 하면, 곧장 다시 상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버린다.
서로 자기 말만 하려는 대화 속에서, 말이 오가고 있어도 ‘함께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렵다.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서로의 독백이 교차하고 있을 뿐인 상황처럼 느껴진다.
말은 오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말만 오래 머무는 자리는 금세 기울어진다.
그런 자리에선, 말하고 싶은 마음보다 말을 삼키는 게 더 익숙하다.
말이 오가는데, 정작 나는 거기 없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그런 감각을 처음 자각한 곳은 독서모임이었다.
처음엔 참 좋았다. 서로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그 안에서 공감하고 다르게 생각하며 확장되는 시간.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말의 균형이 무너지고,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고정된 구조가 되어버렸다.
점점 말을 삼킨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에 바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서로 나눌 수 없는 사람의 말은, 어느 순간 나도 듣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와중에 나는 너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대화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건 평범한 ‘질문–답변’의 구조가 아니다.
나는 너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너는 그 말에 귀 기울여 듣고, 다시 말로 되돌려준다.
그 말을 다시 들으며 나는 또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시 말한다.
이건 일방향이 아니라 왕복의 대화다.
그리고 그 흐름 안에서 나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다시 되찾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여기저기서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아우성이다.
그런 소란 속에서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진심 어린 질문을 건네는 사람은 빛이 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말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관계 맺고 싶은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진짜 대화는 말이 오가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안에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어’라는 감각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너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다시 사람들과의 대화를 꿈꾸게 한다.
이번엔 조금 더 깊이 있는 질문을 건넬 수 있기를.
말이 겹치지 않고, 그 사람에게로 흐를 수 있기를.
그리고 서로에게 건넨 말이, 잠시나마 마음에 머물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