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각들

간절함이 아니어도, 변화는 가능하다

에밀. 2025. 4. 23. 17:29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간절함이 부족해서’라고 단정짓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어제 글을 쓰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말은, 정작 글을 썼던 나 자신에게조차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듯했다.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아직 간절하지 않아서 그래”라고 자극을 주기보다는,
“그래, 나는 애초에 크게 의욕도 없고 간절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대로 있어도 상관없지”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마무리짓는 경향이 있다.


그런 태도는 한편으론 나를 편하게 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변화의 가능성을 미리 포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변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그 물음 앞에서 나는 한 번 더 생각을 밀고 나가보기로 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이
그다지 치열하거나 간절하지 않은 쪽에 가깝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중반 무렵까지, 나는 늘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공부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왜 성적은 늘 이 정도일까?
궁금해진 나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면서 알게 된 건 단순했다.
공부를 즐겁게 여기거나, 어떤 치열함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공부는 별로 재미없었고, 그렇다고 치열하게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싶은 수준에서 멈추곤 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꼭 간절하지 않아도 변화한 순간들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내년에는 해병대에 지원하겠다”고 주변에 몇 달이나 말해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 시기가 다가오자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해병대의 힘들고 빡센 복무기간을 실제로 감당해야할 시기가 가까워지니,
흡사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해병대 갈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말을 번복하면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 것 같았고,
그 생각 하나가 나를 붙들었다.
간절함이 아니라, 책임감과 체면, 그리고 말과 행동 사이의 일관성에 대한 집착.
그게 결국 나를 변화하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돈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해 약간의 강박이 있었다.
부모님이 돈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보며 자랐고,
그 기억이 내 안에 깊게 새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독서실 몇 개월치를 결제해두신 부모님의 마음을 떠올릴 때마다,
“이 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 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매일 독서실에 출석했고, 그 일상이 습관이 되었다.
간절함이 아니라, 손실 회피의 감정과 아까움이 나를 바꾸었던 것.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즐거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느 순간 ‘좋은 대화’가 내게 얼마나 큰 충만함을 주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끝난 뒤, 상대방으로부터 “너랑 대화하면 참 좋다”는 말을 듣는 날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해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심리학이나 관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하나하나 삶에 적용해보는 일이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건 일종의 공부이자 실험, 연구이자 놀이였다.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느낌도, 수고스럽다는 감정도 없었다.
그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그 과정을 직접 느끼고 탐색해보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즐겁고 의미 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경험들을 정리해보면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이 드러난다.
변화는 꼭 간절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간절함은 물론 강력한 원동력이지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들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말을 지키고 싶은 마음,
돈이 아까운 마음,
즐거움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때때로 간절함보다 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를 단정짓는 말을 조금씩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변화하지 않아도 돼.”
이 말은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결국 나를 지금 이 자리, 이 상태에 붙잡아두는 말일 뿐이다.


나는 간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
또 하나의 작은 이유를 발견하고 있다.
나는, 간절하지 않아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