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각들

우리는 왜 좋은 대화를 놓치는가

에밀. 2025. 5. 3. 00:35
좋은 대화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대화를 마친 후, “참 좋은 시간이었어”라는 여운이 남는 순간들이 있다.
무엇이 그 시간을 그렇게 만든 걸까.
유창한 화술이나 유머, 지적인 깊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서로가 충분히 말하고, 충분히 들었다는 감각.
그 ‘충분히’라는 감각이야말로 좋은 대화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히’라는 건 참 애매한 말이다.
분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말을 해야 한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성향, 그날의 기분, 대화의 주제에 따라 그 감각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대화를 마친 직후에는 몰랐던 ‘부족함’이나 ‘과함’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좋은 대화를 기대한다는 건 결국,
상대와 나의 흐름이 그날만큼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작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말하기보다 듣기’다.
심리학자나 대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비율이 있다.
“2:8 혹은 3:7의 법칙.”
내가 말하는 시간은 전체 대화의 2, 3
나머지 7, 8은 듣는 시간으로 가져가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원칙을 이미 알고 있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말을 줄이고 듣는다는 건 단지 입을 다무는 일이 아니다.
상대방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고,
그 말의 맥락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다 들었다’고 착각하면서, 사실은 중간부터 내 생각이 끼어들고, 반박할 말을 속으로 준비하는 일이 다반사다.
좋은 대화는 그런 내적 독백을 잠시 멈추고,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이를 잘 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질문하기’다.
좋은 질문은 좋은 경청에서 비롯된다.
정확하게 들어야 핵심을 짚을 수 있고,
대화를 더 깊이 있게 이어갈 수 있다.
또 질문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순서를 이어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내 이야기만 하고 마친 뒤 이어지는 침묵보다는,
짧게라도 “너는 어땠어?”, “혹시 비슷한 경험 있어?”
라고 건네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러운 흐름을 만든다.


과거에 나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 내가 말할 순간이 올까’, ‘내가 얼마나 논리적인 사람인지 보여줘야지’
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은 결국 내 말하기조차 얕고 짧게 만들었다.
먼저는 잘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말하기가 자연스러워졌다.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바라는 바가 명확해지니
내가 해야 할 말을 고르는 일도 훨씬 간단해졌다.


요즘은 여전히 듣는 시간이 더 많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집중하면서도, 여전히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바로 ‘판단’이다.


예컨대, 누군가 스스로에 대한 말을 많이 하면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구나. 나도 저랬을까?’
이런 판단이 스며드는 순간, 듣기는 흐트러진다.
심지어 더 이상 질문하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생긴다.
좋은 대화에 닿기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느끼는 이유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맥락에 맞는 말을 하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 중 자신에게 ‘꽂히는 포인트’에 반응해버린다.
상대의 질문이나 대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키워드가 동일하기에 겉으로는 관련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화의 줄기를 흐트러뜨리는 말들이 종종 있다.
듣는 입장에서는 이런 엇박자가 쌓일수록 피로감이 느껴지고,
결국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지속되기 어렵다.


맥락에 맞는 대화란, 앞선 말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질문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그 질문에 정확하게 답한 후,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이야기를 더하면 된다.
그리고 화제를 전환하고 싶다면, ‘다리’를 놓는 말이 필요하다.
“아까 네 말 듣다가 생각났는데”, “조금 결은 다르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어”와 같은 표현들이다.
이런 연결고리는 대화의 전환을 부드럽게 해주고, 오히려 더 넓은 이야기로 확장되도록 돕는다.
대화의 가지가 자라는 순간, 우리는 더 깊은 교감을 느낀다.



좋은 대화는 말의 유려함보다 배려의 깊이에 있다.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보다, 서로가 충분히 말하고 들었다는 심리적 충족감이 더 중요하다.
그 충족감을 만들기 위해선 듣기를 중심에 두고, 맥락을 읽고,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 뒤로 미룰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작은 것들을 지켜낸 대화는 말의 교환을 넘어 마음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좋은 대화란 결국, 말을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진심의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