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각들

증오에 관하여

에밀. 2025. 5. 7. 03:47
사랑과 닮은 집중력, 그러나 나를 먼저 파괴하는 감정


증오라는 감정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실제로는 뜨겁게 이글거린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놓칠까 봐’ 계속 주시한다.


“육친의 마음보다 적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했고, 친우에게 줄 것보다 적에게 줄 것을 고민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 행동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보다 적들이 내 공격에 대해 보여줄 반응이 더 궁금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위대한 전사라 말할 때, 그들은 내가 적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 김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극연왕의 말 중



이 문장을 곱씹다보니, 증오는 사랑처럼
‘그를 계속 생각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철없던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이 말이 더 깊이 이해된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미움과 분노가 마음에 가득했다.
복수심에 불타던 그때, 어떻게 하면 그녀가 기분이 상하고 괴로울지를 생각하며,
전에 없던 집중력과 분석력을 쏟아부었다.
온종일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시시각각 상상했다.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위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려 했고,
어쩌면,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들여다보며 애써 만든 말과 태도는,
사랑이 아니라 분노에서 나왔지만, 그 몰입의 밀도는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었다.
단지 그 에너지가 향한 방향이 파괴였을 뿐이다.
그러니 앞서 인용한 말은, 그런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번엔 뇌 속 이야기다.
fMRI로 뇌 활동을 살펴보면, 사랑할 때와 증오할 때 모두
섬엽(insular cortex)과 푸테멘(putamen)이라는 영역이 함께 불이 켜진다.
섬엽은 ‘이 사람은 내게 중요하다’고 표시를 붙이고,
푸테멘은 ‘그 사람과 엮인 행동‘을 계획한다.
다만 증오의 경우 전전두피질이 ‘공격 모드’를 덧붙인다.
뇌는 사랑과 증오를 동일한 급의 ‘중대 사건’으로 간주하고, 에너지를 몰아준다.

결국, 미워한다는 건 단지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을 마음 속 가장 앞자리에 앉히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넘길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모든 감각을 그에게 기울이는 일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얹힌다.
편도체는 손실·위험·배신 같은 부정 신호에 특히 민감해,
노르아드레날린 분비를 끌어올리고 해마의 기억 저장을 가속시킨다.
뇌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부정편향’(negativity bias)이라 부른다.
덕분에 부정적인 경험은 긍정적인 것보다 더 빠르게 저장되고, 훨씬 느리게 희미해진다.

그러니 자꾸 같은 말을 되뇌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마음이 거기서 떠나오지 못하는 건,
뇌가 슬픔과 분노를 더 오래 붙잡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을 쥐고 있는게 아니라, 남은 기억이 우리를 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뇌가 불을 밝혔으니, 마음속 스크린에선 자연히 그 사람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이것은 주의 편향이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정서적으로 강한 대상은 눈앞 자막처럼 떠서, 다른 생각을 밀어낸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반추’라는 반복 재생 기능을 켜서
같은 장면과 대사를 수십 번이고 되감는다.
무대 뒤편의 조명·카메라·편집기가
한 인물을 집요하게 클로즈업하는 셈이다.
사랑할 때 그랬던 장치를, 이번에는 ‘미움’이라는 필터를 씌워 가동한다는 점만 다를 뿐.



결국 증오는 사랑만큼 크고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켜지만,
그 불빛이 가장 먼저 소진시키는 건
조명 장치를 돌리고 있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거기서 드러난다.
사랑과 비슷한 회로를 빌려 켠 스포트라이트지만, 전력 요금은 고스란히 내 계량기에 찍힌다.
그녀를 비추는 동안 먼저 바닥나는 건 내 배터리였다.
사랑이 아닌 증오와 미움의 전류는 빛을 밝히는 대신,
내 내부 배선을 먼저 태워 녹인다.
그리고 그 요금청구서는 곧바로 ‘주의 예산’에서 빠져나간다.

이제부터는 그 과부하가 어떻게 곧바로 자기파괴의 굴레로 이어지는지를 들여다보자.



애초에 인간은 즐거운 일보다 불쾌한 일을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더 오래 기억하도록 설계됐다. 그래서 증오는, 마음속에 오래 머물수록 일상의 여유부터 갉아먹는다.


첫째 손실은 ‘주의 경제’의 붕괴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주의력 총량은 한정되어 있다.
그 대부분을 미워하는 대상에게 투자해 버리면 자연히 가족, 친구, 일, 취미 같은 다른 항목에 쓸 예산이 모자라진다.
더 문제는, 기억을 자꾸 되씹는 ‘반추’가 이 손해를 눈덩이처럼 더 불린다는 점이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되감기하다 보면,  몸속 스트레스 경보는 꺼지지 않고, 코르티솔이 하루 종일 높게 유지된다.
밤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침이면 속이 더부룩하며, 낮엔 작은 일에도 심장이 덜컥거린다.
그건 증오가 보내는 ‘지불 독촉장’이다.


둘째 손실은 자아의 색이 바래는 일이다.
우리는 자주 떠올리는 생각, 자주 쓰는 어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미워하는 이가 냉소적이고 공격적이라면,
그를 이해하고 대비하려 애쓰는 사이,
그의 말투와 시선이 내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내 표정이 그를 닮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원래 소중히 여기던 여유와 따뜻함은 점점 뒷순위로 밀려난다.
그때 올라오는 수치심은 다시 반추로 이어지고,
그 반추는 더 높은 스트레스를 부르고,
결국 방어의 방식으로 공격성을 키워낸다.
이 반복이 바로 ‘자기 손상 루프’다.


셋째 손실은 관계의 감각이다.
우리는 누구와 연결되고, 어떤 기회를 잡느냐에 따라 조금씩 성장한다.
하지만 미움에 매달린 시야는 인간관계를 ‘나 대 그’의 전쟁터로 압축한다.
동료의 칭찬, 친구의 안부, 하늘의 맑음 같은 작은 호의에 눈길이 잘 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요즘 예민해졌어”라고 말하면,
그 말조차 공격처럼 들려 더 움츠러든다.
그렇게 점점 ‘회복될 기회’ 자체가 줄어든다.


이 세 가지—주의, 자아, 관계—가 동시에 막히면,
마치 세 갈래 물줄기가 전부 댐에 가로막힌 것처럼 안쪽 압력이 치솟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듯해도 내부에서는 파이프가 삐걱인다.
결국 증오는 ‘밖으로 던진 화살’이 아닌,
내 쪽으로 ‘되받아치는 철퇴’가 된다.
계속 휘두를수록 내 팔과 어깨가 먼저 멍들고,
마음이라는 관절이 먼저 닳아버린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문득 떠오른다.
희미한 칭찬보다 날카로운 평가와 비난이
하루 종일 귓가를 떠나지 않던 밤들,
아마도 내 뇌가 ‘잊지 마라’며 빨간 표시를 해둔 탓이었겠지.
하지만 그런 밤들이 쌓일수록, 내가 잃은 건 상대가 아니라 결국 자신이었다.

나는 문득 스스로 물었다.
과연 이 손해를 감당하면서까지,
그 사람를 미워할 가치가 있는가?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 비슷한 증오 속에 갇힌 한 사람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