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속에서 ‘나’를 잃는다는 말
“연인을 맞추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
라는 고백은 겉으로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고귀한 헌신처럼 들린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말은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와 ‘관계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혼동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누구도 애초에 완벽하게 타인에게 맞출 수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역사·가치·습관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두 조각이 정확히 포개질 확률은 없다.
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불가능한 일치를 목표로 삼은 착각이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모순이 있다.
정말 ‘맞추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상대의 필요를 완벽히 이해하고 일관된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
그런데 연인의 요구에 완벽히 부응하지도 못한 채, 중간중간 불편함을 느끼고,
억지로 감정을 눌러가며 관계를 이어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맞춤’이라기보다, 내면의 불편함을 외면한 채 시간을 끌어온 것에 가깝다.
맞추려다 느끼는 불편함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내면의 신호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혹은 ‘지금 이건 나를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직감일 수 있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의 연인은 자주 연락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일 수 있다.
처음엔 그 빈도에 맞추기 위해 하루에 몇 번이고 메세지를 보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행위가 점점 버겁고 지쳐간다.
일상에 집중하기 어렵고, 억지로 감정표현을 반복하는 스스로가 낯설어진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연애하면서 나를 잃은 것 같아.“
그리고 조금씩, 연락의 빈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불편함이 충분히 해소되는 지점까지.
물론 이 과정에서 연인은 서운할 수 있다.
그 서운함은 지금껏 상대가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해왔는지에 비례한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이제는 지쳐 있는 연인과 다시 조율을 시도해보거나,
더 이상 조율이 어려운 경우라면 관계의 끝을 말하는 것도
서로를 위한 정직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본질로 돌아가면,
맞춰주는 과정이 불편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불편함은 진짜 나의 목소리다.
모든 불편함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선택하고
말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의 회복이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에 응답하며 움직이는 것.
관계 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면,
그떄야말로 본연의 나를 갖춰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언제, 어떤 순간에 불편했는가?”
그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윤곽선이 스케치북 위에 다시 그려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 속에서도, 관계를 넘어선 삶 속에서도
잃어버렸다 여겼던 ‘나’을 되찾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