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하나로 시작하는 글 읽기 연습
- 국어학원에서 실제로 가르치는 ‘언어분석’ 독해법
국어학원의 학생들을 보면 그저 가만히 글을 보는 경우가 없다.
손에 쥔 연필은 반드시 책 위를 누빈다.
학생들은 자기 앞에 놓인 지문을 내려다보며 뭔가에 열중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려 놓은 선이 놀랍도록 반듯하다.
글자의 가장 아래를 스치듯 지나가는 그 얇은 밑줄이,
사실은 ‘언어분석’이라는 이름의 독해 기술을 켜는 스위치다.
밑줄 하나를 긋는 일은 작은 몸짓이지만, 그 뒤에 숨은 의도는 분명하다.
글의 ‘선’에 집중하라.
나는 이 학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밑줄은 ‘강조’의 용도로만 썼다.
중요한 구절, 마음에 드는 문장, 시험에 나올 만한 단어—그 정도였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어디에, 어떻게 긋느냐’가
읽기의 질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강조한다.
선은 글자에서 너무 떨어져서도, 글자를 가로질러서도 안 된다.
선이 삐뚤어지면 지우고 다시 긋게 하는 것도,
‘글을 반듯한 선과 같이 정확히 바라보라’는 메시지다.
글을 보는 눈이 흔들리지 않으면, 손의 선도 흔들릴 수 없다는 원리다.
그렇다면 어디에 밑줄을 그을 것인가?
학원은 서술어를 최우선으로, 그다음 주어,
그리고 특정 부사어에 선을 긋도록 가르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어는 문장 맨 끝에 정보를 묶어 두는 언어다.
서술어가 나와야 의미가 완성되니, 먼저 그것부터 붙잡아야 한다.
서술어 주변을 둘러싼 주어와 부사어는 사건의 주체와 좌표를 제시한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하고 나면, 나머지 성분들은 자연스레 자리 잡힌다.
문장을 일일이 해부하지 않아도 전체 의미가 이미 윤곽을 드러내는 셈이다.
부사어에 굳이 밑줄을 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같은 정보는 독해의 GPS다.
글을 길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도 없이 무작정 걸어가다 보면 갈림길마다 멈춰 서야 한다.
하지만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좌표가 찍혀 있으면,
중간에 풍경이 조금 달라져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부사어는 그 좌표를 한 줄에 담은 표지판이다.
선만으로는 부족하다. △, ▽, ( ) 같은 기호도 함께 쓴다.
△는 ‘이처럼’, ‘이는’ 같은 지시어에 붙여서
“지금부터 앞 내용을 받는다”는 신호를 세운다.
▽는 ‘하지만’, ‘그러나’ 같은 역접 앞에 놓여 반전을 예고한다.
쉼표와 ‘그리고’로 연결된 나열은 괄호로 묶어 사고를 단순화한다.
눈에 보이는 기호 덕분에 문장이 일종의 그래프처럼 시각화되고,
글의 고도는 고저차를 가지며 이어진다.
간혹 학생들이 이렇게 묻는다.
“선 긋고 기호 붙이면 읽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나요?”
실제로 처음에는 읽기 속도가 늦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밑줄을 긋는 몇 초의 지체가,
문제를 풀 때 되돌아가서 지문을 뒤적이는 시간을 훨씬 줄여 준다.
필요한 정보가 이미 눈앞에 떠 있으니,
정답의 근거를 찾느라 헤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시간 단축 효과가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법이 초등학생에게 특히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학생들은 아직 작업 기억의 용량이 작아서,
글의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머릿속에 띄워 두기 어렵다.
핵심 형태소만 시각적으로 ‘앵커’처럼 박아 두면,
머릿속 부담이 대폭 줄어든다.
반면 고등학생은 이미 자신만의 표식이나 메모 습관이 굳어 있어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더딜 때가 있다.
배운 것을 먼저 지우고 새 방식을 자리 잡히게 해야 하니,
어찌 보면 ‘언러닝’ 비용이 드는 셈이다.
언어분석의 두 번째 엔진은 ‘문장 간 관계’를 읽어 내는 일이다.
문장이 몇 개 모여 문단이 되고,
그 문단의 의미는 문장과 문장이 잇는 관계 속에서만 완성된다.
“왜?” “그래서?” “그러나?” 같은 질문이 문장 사이에 숨은 힘줄이다.
예를 들어 “폭우가 쏟아졌다. 그래서 강이 넘쳤다.”라는 두 문장은
원인과 결과를 직선으로 묶는다.
만약 “그러나”로 연결된다면 관계는 대비로 바뀌고,
첫 문장의 의미는 즉시 달라진다.
그러므로 문장을 떼어 내서 ‘이 문장은 이런 뜻’
이라고 적어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전, 이후 문장과 얽혀 만들어 내는 의미장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나는 처음 이 원리를 듣고 아이들에게 작은 실험을 시켰다.
지문에서 한 문장을 지우고, 나머지 문장으로만 요약문을 쓰게 했다.
예민한 학생들은 “앞뒤 문장이 갑자기 이어지지 않는다” “흐름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바로 그 빠진 문장이 문단의 연결 고리였던 셈이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 친 연결 문장을 다시 써 넣는 순간,
‘관계 읽기’의 필요성이 체화된다.
결국 언어분석이란 거창한 기술이 아니다.
글자를 해부하기보다 글이 흘러가는 방향을 눈과 손으로 따라잡는 훈련이다.
밑줄 하나, 기호 하나는 그 흐름을 포착하려는 장치다.
밑줄을 긋는 손끝이 곧 눈의 방향을 규정하고,
눈이 잡아낸 흐름이 곧 머릿속 의미 지도를 그린다.
학생들에게 연필을 쥐여 주며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선을 곧게 긋는 건 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야.
선만 잘 따라가도 글은 스스로 길을 열어 준다.”
오늘도 교실 한편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지문 위에 얇은 선이 조용히 그어지고 있다.
그 작은 선은 책장보다 얇고, 확성기보다도 조용하지만,
한 사람의 독서를 바꾸어 놓을 만큼 선명하다.
독해가 막막하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연필을 들어 글자의 발치에 선 하나를 그어 보라.
글은 선을 타고 흐르다가,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