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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생각들

사랑은 조건부다

by 에밀. 2025. 5. 5.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라는 말의 함정


우리가 처음 누군가와 친해질 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같은 말을 자주 던진다.
이런 말은 작은 실수나 다름을 무난히 넘어가게 해 주는 관용의 언어다. 낯선 사이가 금세 편안해지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나 역시 그랬다.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서, ‘불편함’보다는 ‘이해’를 먼저 택했던 적이 많았다.
그게 더 성숙한 태도라고도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문득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이해해 준 건 괜찮았지만, 그걸 내 기본값이라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관용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관계적 프레임’―‘이 관계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받아들여질까’라는 기본 틀―을 고정해 버린다.
사진 틀을 한 번 걸면 그 위의 모든 작품이 같은 규격으로 보이듯, 일단 굳어진 프레임 안에서 이후 사건들은 거의 자동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보자. 썸을 타는 동안 상대가 만날 때마다 30분씩 늦었는데도 “바빴구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웃으며 넘겼다고 해 보자. 그땐 정말로 괜찮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 상대 머릿속 설명서에는 ‘시간을 조금 어겨도 별문제 없다’라는 문장이 기록된다.


그 설명서는 연애로 전환된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오늘은 제발 늦지 마”라고 말하면, 상대는 당황한다.
“지금까지는 괜찮다더니, 왜 갑자기?”
내 입장에선 지금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상대는 기존 설명서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느끼며 심지어 억울함이나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때부터는 힘이 든다. 설명하고,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리고,
내가 왜 말을 아꼈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프레임을 바꾼다는 건 그런 일이다.
오래된 집 구조를 바꾸는 것처럼, 모든 가구를 들어내고 벽을 다시 짜야 하는 일이다.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훨씬 쉬운데, 왜 이제 와서 틀을 고치려 하냐는 말도 듣게 된다.


이렇게 관계에서 ‘틀을 바꿀 때 치르는 값’을 심리학에서는 프레임 변동 비용이라고 부른다. 틀을 손대면 보강공사까지 따라오기 마련이니 심리적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을 고치지 않으면 결국 내가 무너진다.


게다가 시간이 더 흐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처음엔 한두 번 이해해 준 것이었는데, 어느새 그게 ‘늘 그래왔던 일’이 된다. 상대는 내게서 지속적으로 관용을 받아온 사람이기에, 그 기대에서 스스로도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라는 내 말은 닿지 않는 변명이 된다.
“예전엔 다 받아줬잖아.”
그 말에 난 조용히 입을 닫는다.


이게 바로 매몰 비용ㅡ지금까지 받아온 관용이 주는 당연한 권리감ㅡ이다.
이미 너무 많이 이해해 준 탓에, 이제 와서 기준을 말하는 건 늦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상대를 탓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나만 참기에는 너무 지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도 안다. 관용은 관계의 윤활유다.
다만 그 윤활유를 너무 넓은 영역에, 아무 기준 없이 뿌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그래서 경계선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용을 베풀 때 나만의 기준을 함께 꺼내려 한다.
“오늘은 늦어도 괜찮아. 대신 다음에는 10분 안에는 와 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이해받았다’와 ‘다음에는 조심해야겠다’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프레임이 ‘유연하지만 경계가 있는 관계’로 자리 잡으면, 나중에 틀을 조정할 떄 큰 충돌 없이 미세 조정으로도 해결된다.


또 하나, 작은 의견 차이를 자주 말하는 습관도 도움이 된다.
“나는 이런 게 조금 힘들더라”, “이런 방식이 좋더라”고 가볍게 꺼내 보면, 상대는 나라는 사람의 세세한 결을 배워간다. 그런 말들이 쌓이면,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가 생긴다.
“우리 관계는 언제든 조금씩 조정할 수 있어.”


그러면 나중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도 훨씬 부담이 덜하다.
“우리는 평소처럼 이야기하면 되니까.”
이 말이 주는 안정감이 생각보다 크다.
‘언제까지 내가 참아야 할까?’ 같은 마음속 독백이 쌓이기 전에,
작은 조정으로 큰 갈등을 예방하는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불편한 감정을 너무 오래 품지 않는 일이다.
처음엔 사소하게 넘겼던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짐이 되어 돌아온다.
“사실 그때 조금 서운했었어.”
“그 말이 나한텐 좀 무겁게 느껴졌어.”
이런 말이 너무 늦지 않게 나올 수 있다면, 틀 전체를 다시 고치지 않아도 된다.
“아 미처 몰랐네. 미안해”하고 그냥 나사를 한두 바퀴 조이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다시 부드럽게 움직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말은 왠지 아름답고, 순수하고,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정말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게 과연 건강한 사랑일까?


조건이 없다는 말은, 책임도 경계도 없다는 말로 바뀌기 쉽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받아 줄 것이라는 기대는 사랑을 점점 돌봄이 아닌 소비로 만든다.
“그래도 사랑하잖아.”
그 말은 사랑을 지키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무너뜨리는 말이 되기도 한다.


반면, 조건부 사랑은 조금 차갑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엔 ‘서로를 존중하면서 오래 가고 싶다’는 마음이 숨어 있다.
“존중이 지켜지면 사랑을 이어 가겠다”, “폭언이 반복되면 관계를 재고하겠다”와 같은 말은
협박이 아닌 관계의 사용 설명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관계가 서로 어떤 기준 위에 서 있는지조차 모른채 흔들릴 수 있다.
사용 설명서 없이 기계를 돌리면 고장 나기 쉬운 것처럼, 기준 없는 사랑도 작은 충격에 금이 간다.


분명한 조건이 있을수록 우리는 어떤 행동이 사랑을 키우고 어떤 행동이 상처를 남기는지 더 빨리 학습할 수 있다.
조건은 사랑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사랑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지켜 주는 울타리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도 틀과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방식으로 사랑하자.”
그 말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관용은 관계라는 수레를 움직이게 해 주는 기름이다.
하지만 그 수레가 길을 이탈하지 않게 하려면, 방향을 잡아 주는 두 바퀴가 함께 돌아야 한다.
관용과 기준. 그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루면, 우리는 훨씬 더 멀리, 훨씬 더 부드럽게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작은 경계가 내일의 큰 자유를 지켜 준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오래,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