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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생각들

하지만 그렇게 할게요

by 에밀. 2025. 3. 28.

늦은 밤 숏폼을 보며 잠을 미루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영상 속 상황은 이랬다.


한밤 중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집 외부조명이 너무 밝아 잠을 잘 수 없다며 꺼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 였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사실 전날 한 차례 이야기 되었고,
경찰도 와서 외부조명이 옆집까지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 한 남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근데 그렇게 해드릴게요! 10시가 되면 불을 끌게요!”

할머니는 놀라며 그렇게 해주겠니?라고 묻고는 미안하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사실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가 아주 참을성이 대단하고 착한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았다.
문제는 할머니의 태도이다.
원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으니 고맙다 하면 될 일이 아닌가?
왜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걸까?


뒤이은 남자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외로울 땐 언제든 오세요. 대화하고 밥도 같이 먹고 와인도 마셔요.”


사실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으면서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다소 어긋났던 것이다.


남자가 참 생각이 깊고 섬세하다고 느껴졌다.
겉으로만 보이는 할머니의 태도만 본 것이 아니라,
왜 이 분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통찰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동일한 상황에 처했었다면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어쩌면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했으니,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단정 지었을지도 모른다.
관계를 풀기보다는 단절하거나, 차단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남자의 태도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한 두번의 대화만 가지고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1분도 안되는 영상을 통해 돌아보게 된 것은,
내 나름대로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깊이 남은 부분이 있다.

남자는 단순히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라고 바로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어제도 충분히 이야기한 바가 있고, 경찰도 다녀갔고,
사실상 조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드릴게요.”


나는 이 장면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무조건적인 양보처럼 보일 수 있는 말도,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말한 뒤에 건네는 “괜찮아요”는
그 안에 책임 있는 배려가 담겨 있다.
상대방에게도 ‘내가 어디까지 배려하고 있는지’가 전해질 수 있고,
무엇보다 자신도 후회 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나의 마음도 함께 지켜내는 일.

그 둘은 동시에 가능하다는 걸,
한 사람의 태도에서 배웠다.

나는 그동안 배려란 결국 어느 정도의 희생을 동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배려한 뒤에 오히려 마음 한 켠이 허전하거나,
시간이 지나 후회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하지만 그렇게 할게요.”라는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헤아린다는 건,
나를 무시하거나 지우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충분히 전한 뒤,
상대의 마음을 품는 일.

“하지만, 그렇게 할게요.”라는 말은
단순한 포기와 수용의 언어가 아니라
배려를 단단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엔 나도 그렇게 말해보고 싶다.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나도 지키고 너도 품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