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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생각들

통제하고 싶었던 건, 결국 나 자신이었다

by 에밀. 2025. 4. 14.
나는 가끔, 아니 꽤 자주, 내가 통제욕이 강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내게서 떠나려는 사람도 막지 않는다.
바로 앞에 통제욕이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해놓고 이렇게 말하면,
앞뒤가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곁에 머무르겠다고 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내 감정을 흔들어놓는 방식은 피했으면 좋겠다.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거나,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게 만드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통제욕이 강한 것은, 사람 자체라기 보다는 ‘감정’에 대해서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내 감정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특히, 내가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걸, 분노에 휩쓸리는 걸 견디기 어려워한다.


화가 나면 손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그 순간의 나를 보면 정말이지 싫다.
그래서 분노가 차오를 때면 스스로 묻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화를 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을까?’
없다라는 판단이 드는 순간, 아무리 강하게 끌어올랐던 감정이라도 빠르게 식는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감정의 찌꺼기들.
그 잔여들을 없애기 위해, 조용히 나를 수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간을 주지 않을 때다.
내가 조용히 있고 싶은데 날선 말을 이어 언성이 높아지게 하고,
내가 감정을 다스리는 중인데 다시 감정을 들쑤시는 행동을 하면
그게 방해처럼 느껴진다.
결국 거칠게 말하게 된다.
“제발 조용히 해줘.”
“지금은 말하지 말아줘.”
통제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사람에 대해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내가 통제하고 싶었던 건, 결국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걸.
내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외부 환경까지 바꿔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 아닐까?
그 사람을 조용히 시켜야 내가 비로소 조용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분노할 때만 그런 게 아니다.
서운함도 마찬가지다.


서운함은 기대에서 온다.
기대는 마음을 주는 일이고,
마음을 준 만큼 상대가 그만큼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을 때,
서운함은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 감정들이 나를 감싸는 것이 너무 싫다.
서운함, 질투, 시샘, 우울…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 오래 머무는 걸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덜 주려고 한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자.
상대가 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느끼면, 내가 먼저 마음을 접자.


그러면 감정의 소모가 줄어든다.
덜 흔들리고, 덜 괴롭다.



나는 관계 속에서 이런 행동들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거나
‘너무 선을 긋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준이 있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내가 유독 힘들어하는 사람의 태도들이 있다.
그것을 나는 ‘어긋남’이라고 부른다.


내가 생각하는 어긋남이란, 이런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합의없는 기대를 하고 실망하는 것.
자기 바람을 말로 하지 않고 눈치로 티를 내는 것.
선택을 스스로 해야 하는데, 나에게 자꾸 물으며 결정의 책임을 넘기려 하는 것.


정말 결정이 어렵거나, 내게 조언을 구하려는 태도라면 괜찮다.
예를 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든지,
“나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처럼
내 생각을 듣고 싶은 마음이 명확히 느껴지는 상황은 편하다.
그런 경우엔 상대가 내 의견을 참고하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정해둔 결론이 있으면서도
그 선택을 내 입에서 나오게 하려는 듯한 태도,
혹은 자기 감정을 나를 통해 대신 표현하려는 듯한 방식은 불편하다.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감정에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고,
결정의 무게까지 함께 떠맡게 된다.
그게 싫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껴졌던 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들은 자주 물어봤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뭘 바라는지, 어떤 마음인지.
그건 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태도였고,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자기 의견과 내가 다를 때도
“너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때?”
“이렇게 보는 것 좀 그렇지 않아?”
설득을 할 때에도 나를 꺾는 방식이 아니라
‘너와 함께하고 싶으니, 나의 방식도 너에게 나눠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건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려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의 시선을 나눠보려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라는 게 있으면 말로 명확히 표현했다.
“이렇게 해줄 수 있어?”
“이거 부탁해도 될까?”
나는 그렇게 명확한 요청이 오히려 더 편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고,
기꺼이 들어줄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태도는 나에게 부담이나 눈치를 지우지 않았고,
내 감정을 휘두르거나 흔들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관계는 피로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감정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한 질서를 세워 가고 있다.
그 질서가 때론 통제로 보일 수 있고,
관계에서 선을 그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경계일 뿐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로 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