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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책을 읽다 든 생각#6 : 죄악감과 죄책감이 삶에 드리우는 그림자

by 에밀. 2025. 3. 9.
후회가 많은 밤



오랜만에 책장 깊숙이 꽂혀있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책 좀 읽었다"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지닌 작품입니다. 유익하다는 찬사만큼이나 어렵다는 평도 많지만, 저는 그 모든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데미안>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언어들을 곱씹으며 다양한 생각을 펼치고, 마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경험은 분명 값졌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러한 표현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던 예전의 저는 책장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졸음을 쏟아내기 일쑤였습니다.


최근 다시 <데미안>을 읽으며, 세 번째로 싱클레어와 크로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접했을 때,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 하나가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악감과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 입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죄악감은 특정 행위를 '죄악'이라고 인지하며 느끼는 감정이며, 죄책감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는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정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개인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뒤틀어 놓을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 이야기를 통해 죄악감과 죄책감, 수치심이 개인의 삶에 어떠한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처럼 <데미안>이 그저 어렵고 졸린 책으로 느껴지는 분들에게 이런 식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시각으로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1.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 빛의 세계로부터의 소외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덫에 걸려 난생 처음 도둑질이라는 죄를 짓게 됩니다. 크로머가 요구한 2마르크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방에 있던 저금통에 손을 뻗은 것입니다. 이 작은 도둑질 이후, 싱클레어는 더 이상 부모님의 보호 아래, 즉 ‘빛의 세계’에 온전히 속해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부모님은 아직 싱클레어의 범죄를 알지 못하지만,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인 싱클레어 스스로가 빛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그림자를 개인이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내면의 어두운 면이라고 설명합니다.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는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존재이며, 그와의 관계를 통해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의 어둠과 직면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싱클레어는 주변의 모든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입니다. 자신의 죄가 발각될까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짓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악감과 죄책감은 개인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왜곡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더 이상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에 속해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안과 의심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죄악에 대한 마음의 방벽 약화: 죄의 반복과 심화

싱클레어는 한 번의 좀도둑질 이후에도 크로머에게 계속해서 약점을 잡히게 됩니다. 이는 한 번 죄를 짓는 경험이 죄에 대한 심리적 저항선을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체념을 하듯이 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싱클레어가 점점 악에 침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이후 더 큰 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짓눌린 마음은 쉽게 무너지고, 또 다른 죄의 유혹에 저항하기 어려워집니다. 싱클레어의 경우, 크로머의 협박에 굴복하며 죄를 반복하게 되고, 이는 더욱 깊은 죄악감과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이처럼 죄악감과 죄책감은 단순히 일회적인 감정을 넘어,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발하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여 개인을 심연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3. 자존감의 손상: 떳떳함의 상실과 행복 불감증

자신의 자아 앞에 드리워진 ‘범죄를 저지른’이라는 꼬리표는 싱클레어로 하여금 그 어떤 행동도 떳떳하게 할 수 없도록 옭아맵니다. 죄책감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형벌과 같습니다. 그 결과 죄를 지은 자신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단죄하며, 작은 행복조차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수치심은 자신을 ‘부정적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내면화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기 비난과 자기 혐오를 증폭시켜 자존감을 근본적으로 갉아먹습니다. 이처럼 죄악감과 죄책감은 개인의 자존감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습니다. 특히 수치심은 자신을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내면화시키고, 자기 혐오와 비난으로 이어져 자존감 하락의 핵심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신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이는 행복 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억압하고, 삶의 만족도를 현저히 낮추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론: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는 삶의 중요성 - 행복으로 향하는 길

<데미안>의 ‘카인’ 파트까지 읽으며 싱클레어와 크로머의 관계를 통해 짚어본 죄악감과 죄책감은, 결국 양심의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나침반과 같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합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죄책감에 휩싸이는 것은, 스스로의 인생에 장애물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죄를 반복하는 삶은, 결국 우리 자신을 불행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죄 없이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죄를 멀리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도덕적 강요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직결되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선악의 개념이나 죄의 무게를 떠나서, 삶 속에서 개인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면, 결국 양심에 따라 죄를 멀리하는 삶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데미안>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진정한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정화하고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겠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의문이 해소 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양심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던져봐야겠습니다. 어쩌면 양심은 우리를 완벽한 정답으로 이끄는 절대적인 나침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개인의 경험, 가치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양심의 목소리가 혼란스럽고 갈등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자체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데미안>은 그저 단순히 ‘죄를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